임금과 신하가 이룬 예술적 성취, 세종대왕과 박연의 국악 이야기

안녕하세요. 씽귤입니다.
세종대왕의 전폭적인 지원과 박연의 부단한 노력으로 국악의 체계적인 정리가 가능했습니다. 세종대왕과 박연이 함께 이룬 예술적 성취를 알아보겠습니다.   

역사 속 사제(師弟)의 만남과 협력의 시작

세종대왕과 음악가 박연(朴堧)은 국악사에 길이 남을 황금 콤비였습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세종이 즉위하기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418년, 세종이 세자 시절 교육을 받던 세자시강원에서 박연은 글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있었습니다. 박연은 어려서부터 가야금, 거문고, 장구, 피리 등 여러 악기에 능했고 특히 피리 연주에 뛰어났다고 전합니다. 이러한 박연의 음악적 재능을 일찍이 눈여겨본 세종은 즉위 후 곧바로 그를 음악 관련 관직에 발탁합니다. 세종 1년(1419)에 박연을 봉상시 판관악학별좌(국가 음악 업무를 관장하는 직책)에 임명하여, 나라 음악을 정비하는 중책을 맡긴 것이죠.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남다른 관심이 있던 세종과, 학문과 음악 모두에 능통했던 박연이 드디어 한 팀을 이뤄 조선의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갈 채비를 갖춘 것입니다.

두 사람의 협력은 단순히 음악을 좋아하는 임금과 음악가의 만남을 넘어, 유교 예악(禮樂) 이념 구현이라는 국가적 과업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세종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예(禮)와 함께 음악(樂)이 중요함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고 조선을 예악이 조화를 이룬 유교 이상 국가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품고 있었습니다. 박연 역시 예악에 뜻을 두고 어려서부터 관련 서적을 탐독하며 음률 연구에 힘써온 인물로서, 세종의 뜻을 받들어 국가 의례에 걸맞은 음악 체계를 마련하는 데 일생을 바치게 됩니다.


궁중음악의 개혁: 향악과 아악의 조화로운 정비

세종 즉위 당시 궁중음악은 향악(鄕樂)·당악(唐樂)·아악(雅樂)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향악은 신라 이래 내려온 우리 고유 음악, 당악은 당나라 계통 음악, 아악은 고려 예종 때 송나라에서 들여온 주나라 고제(古制)의 의식음악이었지요. 각종 연향(잔치)에는 주로 향악·당악이, 제례 의식에는 주로 아악이 사용되었는데, 엄격한 격식을 중시하는 유교 국가 조선의 공식 행사 음악을 정비할 필요가 컸습니다. 이에 세종은 박연에게 궁중 및 국가 행사에 사용할 악기와 음악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것을 지시합니다.

박연은 임금의 명을 받들어 먼저 궁중음악을 아악 중심으로 개혁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기존의 향악 등 여러 곡들을 악보로 정리·편찬하면서 동시에 제대로 연주할 수 있도록 악기를 제작·개조하였습니다. 특히 음의 높낮이를 정확히 결정한 12율관(律管), 즉 12개 표준 음관을 만들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궁중 악기의 꽃”이라 불리는 타악기 편경(編磬)도 국산 재료로 제작하였습니다. 나아가 모든 궁중 악기의 음정을 하나하나 정확히 조율하여, 연주 시 음의 혼란이 없도록 통일된 조율 체계를 구축했지요. 이러한 토대를 마련한 후, 박연은 궁중음악의 운용을 향악 위주에서 아악 중심으로 개편하고자 했습니다. 공자의 위패를 모신 문묘 제례악은 철저히 아악으로 정비하고, 종묘 제례악 역시 가능한 한 아악을 위주로 연주하도록 체계를 세웠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세종과 박연이 향악과 아악의 비중을 놓고 진지하게 고민한 대목입니다. 어느 날 종묘제례를 마치고 돌아온 세종은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백성들은 본디 향악에 익숙한데, 종묘 제사에서 처음부터 아악만 연주하고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겨우 향악을 연주하고 있다. 과연 평소 좋아하시던 향악을 조상님들께 올리는 것이 어떻겠는가?” 세종은 평소 백성들이 즐겨 듣던 우리 음악(향악)을 제례악에 더 넣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박연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상소문을 통해 “궁중음악은 격조 높은 아악으로 통일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견해를 올렸고, 세종은 결국 박연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임금이 신하의 전문적 식견을 존중해 준 사례로, 두 사람 모두 궁중음악의 이상적 방향을 진지하게 모색했던 것을 보여줍니다. 박연은 이러한 개혁 작업에 심혈을 기울인 나머지 병까지 얻었다고 전하지만, 그만큼 치밀한 고증을 거쳐 궁중음악을 일대 개편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또한 개혁 과정에서 오히려 사라질 뻔한 우리 향악 곡목 40여 곡을 수집하여 악보로 남기는 성과도 이루었습니다. 이처럼 세종의 비전과 박연의 노력이 맞물려 조선의 궁중음악은 체계화되었고, 오늘날까지 종묘제례악문묘제례악 등의 형태로 그 전통이 면면히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종묘제례악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될 정도로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정간보의 창제: 우리 악보의 탄생과 음악 이론의 혁신

세종과 박연의 국악 혁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 바로 악보의 발명입니다. 세종 이전까지 동아시아의 전통 음악에서는 음의 길이(박자)를 명확히 표기하기 어려웠습니다. 세종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 제정한 음악을 체계적으로 보급하고자, 마치 우물정(井) 자 모양의 격자 속에 장단과 음을 기록하는 정간보(井間譜)를 고안해냈습니다. 정간보는 한 칸(정간)이 한 박(拍)에 해당하며, 각 칸 안에 율명(음 이름)을 써넣어 음의 높이와 길이를 모두 표시하는 동양 최초의 유량(有量) 악보였습니다. 이를 통해 악곡의 리듬과 선율을 정확히 문서화할 수 있게 되었고, 음악의 보존과 전승 방식에 혁신이 일어났습니다. 세종이 창안한 정간보는 사용법이 비교적 간단하여 누구나 짧은 시간 내에 익힐 수 있었고, 이후 악곡의 편찬과 교육에 핵심적인 도구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세종 때 만들어진 새로운 음악들은 모두 정간보로 기록되었고, 《세종실록》 부록에는 정간보로 기록된 악보가 무려 640여 쪽이나 실려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합니다. 정간보의 창제는 국악 이론의 체계화를 한층 앞당겼습니다. 박연은 세종의 새 악보를 활용해 앞서 언급한 향악 곡들과 여러 의례음악을 체계적으로 악서(樂書) 형태로 편찬할 수 있었고, 음악의 이론적 연구와 전승이 한층 과학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훗날 세조 대에 이르면 정간보를 보완한 오음약보 등이 도입되고, 성종 때는 음악백과라 할 《악학궤범》이 편찬되는 등 세종·박연 시기의 음악 이론 정리가 훗날 국악 이론 발전의 든든한 주춧돌이 되었답니다.


황종율관과 악기 개량: 우리 음률의 표준 확립

세종과 박연은 새로운 음악을 연주할 악기 자체를 혁신하는 일에도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우선 정확한 음높이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 황종율관(黃鍾律管), 즉 12율 가운데 첫째 음인 황종(黃鍾)의 소리를 내는 표준 음관을 만드는 작업이 추진되었습니다. 당시 표준음 고정법으로 중국에서 사용되던 방법은 일정한 길이의 대나무 관에 곡식의 일정량을 채워 넣어 음을 내는 것이었는데, 박연과 세종은 이 원리를 토대로 우리만의 율관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예컨대 대나무 관의 길이를 좁쌀이나 피세환(기장) 알곡의 개수로 측정한 후, 그 관에 곡식을 가득 채웠을 때 나는 소리를 기준음으로 삼고, 거기서 3분의 1 분량을 덜어내거나 추가하는 삼분손익법(三分損益法)으로 다음 음정을 산출하는 식이었지요. 박연은 여러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완벽한 황종율관 제작에 성공했고, 이를 기준으로 나머지 11개 율관도 모두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음의 높낮이가 표준화되자, 비로소 모든 악기의 조율을 한 기준에 맞추어 체계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2율관을 이용해 조율한 편경 소리가 제대로 울릴 때까지 세종과 박연은 수없이 음을 들어보고 고치는 노력을 계속했는데, 이는 곧 조선 음악의 표준 음고(音高)를 확립한 커다란 성과였습니다.

특히 세종과 박연은 악기 개량 및 창제 측면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고려 시대부터 써오던 편종·편경 등의 아악기는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었는데 세월이 지나 음정이 틀어지고 일부는 훼손되어 사용이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세종 7년(1425) 경기도 남양에서 다행히 맑은 소리가 나는 경석(磬石), 즉 편경에 쓸 만한 옥돌이 산출되자, 세종은 박연에게 이를 활용해 새로운 편경을 만들 것을 명합니다. 박연은 여러 차례 실험을 거듭한 끝에 1427년 마침내 열두 개의 옥돌 경판으로 구성된 편경 한 틀을 만들어 임금께 바쳤습니다. 조선산 옥돌로 만든 이 편경은 음정이 정확하고 맑은 소리를 냈으며, 세종은 “드디어 우리 조선의 고유한 소리를 찾았다”고 크게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실제 연주에서 편경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음정 변화가 없는 악기로서, 다른 모든 악기의 음을 맞추는 기준 악기 노릇을 톡톡히 하게 되었습니다. 세종은 편경을 가리켜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숨기라”는 명을 내렸을 정도로 중요하게 여겼는데, 이는 그만큼 편경이 국가 음악의 표준음을 지키는 핵심 악기였음을 뜻합니다.

새로 제작된 조선의 편경은 음향적 성능 면에서도 중국보다 우수했습니다. 세종은 당시 제작된 우리 편경의 음높이가 중국 것이나 기존 것보다 오히려 정확하다고 평가하였고, 이는 박연이 편경의 디자인을 개선한 덕분이었습니다. 중국 편경·편종이 각기 크기를 달리하여 음정을 내는 데 반해, 박연은 우리 편경의 경판 16개를 크기는 거의 같게 하고 두께만 다르게 제작함으로써 음정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이러한 설계는 제작과 조율을 한층 체계화하였고, 이후 편경 제작에 하나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한편 박연은 편경 외에도 편종(編鍾)·특종 등의 금속 종류 악기, 훈(塤)·지(篪) 등 오랜 전통의 관악기도 새로 만들거나 조율하였으며, 기존의 가야금·비파 등 여러 국악기를 손보고 개량하여 새 음악에 어울리는 소리를 내도록 하였습니다. 세종 자신도 악기 연구에 깊이 빠져 밤낮으로 고심하였는데, 심지어 왕이라는 신분도 잊은 채 땅을 두드리며 음을 탐구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입니다. 세종 31년(1449) 기록에는 “임금께서 막대기로 땅을 치며 하룻밤 만에 새 음악을 만들어내셨다”는 귀절이 등장하는데, 이는 세종과 박연이 악기와 음의 이론, 음악 창작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연구를 이뤄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국악 발전의 제도적 기반과 현대에 전하는 유산

세종과 박연의 공조를 통해 확립된 국악의 성과들은 제도적 기반 위에서 오래도록 계승·발전될 수 있었습니다. 세종은 애초에 장악원(掌樂院) 등의 음악 기관을 정비하고 인재를 양성하여 예악을 진흥하고자 하였고, 이러한 구상 아래 박연 같은 인물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박연은 악학별좌로서 단순히 음악을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궁중 악공들을 지도하고 악보와 이론서를 편찬하는 등 국가 음악 행정과 교육 전반을 체계화했습니다. 세종은 박연의 업적을 높이 사 여러 차례 포상하였는데, 특히 아악 정비를 마치고 새 음악을 처음 연주했을 때는 안장을 얹은 말까지 하사하며 치하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조정에서 음악 분야를 국가 차원에서 중요시하고 장려했음을 보여주는 일화로, 이후로도 음악에 뛰어난 인재들이 조선 조정에서 활동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었습니다.

세종과 박연이 이룩한 국악사의 금자탑은 이후 세대를 거치며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이들이 정비한 음악과 악기들은 후대 왕들에 의해 계승·발전되었고, 박연이 악보로 남긴 여러 곡과 지식들은 15세기 후반 《악학궤범》 편찬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세종은 재위 기간 여민락(與民樂), 보태평(保太平), 정대업(定大業) 등 여러 곡을 작곡하여 새롭게 선보였는데, 이러한 작품들은 세월이 흘러도 궁중과 민간에서 애창되거나 중요한 의식에 사용되었습니다. 여민락은 왕과 백성이 함께 즐긴다는 뜻을 담아 만든 곡으로 지금도 전통 관악합주곡의 백미로 꼽히고, 보태평·정대업은 세종의 뒤를 이은 세조 때 종묘제례악의 중심 악장으로 채택되어 오늘날까지 종묘에서 연주되고 있습니다. 세종과 박연이 열었던 음악의 황금기 덕분에, 조선은 이후 수백 년간 탄탄한 궁중음악 전통과 이론 체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 유산은 일제강점기 등의 시련 속에서도 명맥을 이어 20세기 이후 국립국악원 등의 설립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현재 국립국악원이나 여러 국악 단체에서 연주되는 종묘제례악, 문묘제례악, 정악(正樂) 등의 곡목들은 바로 세종과 박연 시절 정비된 음악들이 바탕이 된 것입니다. 또한 이들이 확립한 음계와 악보 체계는 현대 국악 작곡과 연주에 이르기까지 그 철학이 면면히 스며 있습니다.

  • 세종대왕: 한글 창제로 유명하지만 국악에도 깊은 애정을 가지고 여러 악곡을 직접 작곡하고 정간보를 창제한 문화 군주. 음악을 정치에 활용하여 백성들의 풍류 생활을 장려하고, 예악으로 태평성대를 열고자 하였다.

  • 박연: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之一로 불리는 조선의 악학자. 어려서부터 예악에 뜻을 두고 음악 이론과 실기에 뛰어났으며, 세종의 신임을 얻어 국악의 표준음과 악기를 만들어내고 궁중음악을 집대성하였다. _난계(蘭溪)_라는 호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노력은 오늘날까지 귀감이 되고 있다.

세종과 박연 두 사람의 인연과 협업은 임금과 신하가 함께 이룬 예술적 성취의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힙니다. 세종은 박연을 통해 조선의 음악을 새롭게 꽃피울 수 있었고, 박연은 세종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쳐 국악사에 큰 족적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정간보의 발명, 12율의 정립, 악기 제작과 음향 과학의 발전, 의례음악의 체계화 등 이들이 남긴 업적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 한국음악사의 혁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