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공연 무대, 산대(山臺)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

신라에는 야외 공연을 위한 무대 장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무려 1400년 전 신라 시대에도 오늘날의 야외 공연장과 같은 ‘산대(山臺)’라는 무대 장치가 존재했습니다. 산대는 이름 그대로 ‘산의 모양을 본뜬’ 구조물로, 당시의 최첨단 기술과 예술이 집약된 종합 공연 무대였습니다.

산대는 어떤 무대 장치였을까?

산대는 단순히 배경이 되는 장식이 아니었습니다. 그 구조와 기능은 매우 정교하고 전문적이었습니다.

  • 봉사도(奉使圖)에 묘사된 산대: 조선 시대 화가 아극돈(阿克敦)이 1725년경 그린 <봉사도>를 보면 산대의 모습이 아주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 속 산대에는 사람 키 높이만 한 바퀴가 달려있는데, 이를 이용해 무대를 밀어 옮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동이 가능한 무대를 '예산대(曳山臺)'라고 불렀고, 고정된 무대는 '산대(山臺)'라고 했습니다.

    아극돈 봉사도(1725년) 전체
    아극돈 봉사도(1725년) 중 우측 부분 확대(예산대 모습)

  • 대규모 공연의 장: 산대 공연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진행되었습니다. 무려 600명에 달하는 광대와 기예단이 동시에 출연하여 대규모 종합 공연을 선보였는데, 이는 당시 신라의 문화적 역량과 기술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산대에서는 어떤 공연을 했나?

산대는 단순한 무용이나 음악 공연을 넘어, 다양한 예술 장르와 기술이 결합된 종합 예술의 장이었습니다.

  • 첨단 기술이 적용된 무대: 산대 위에서는 오늘날의 오케스트라 피트처럼 무대 위 인형이나 장치가 오르내리는 기술이 활용되었습니다. 또한, 화약을 이용한 불꽃놀이와 같은 특수 효과까지 동원된 것으로 보아,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과학 기술이 적용된 무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다채로운 연희의 향연: 산대 위에서는 왕실의 권위를 보여주는 궁중 무용부터 민중의 삶을 담아낸 연희까지 모든 공연이 펼쳐졌습니다. 처용무(處容舞)나 복숭아를 바치는 궁중 무용 헌선도(獻仙桃)와 같은 품격 높은 춤이 있었고, 민간에서는 오광대놀이, 줄타기, 장대타기, 땅재주 등 풍자적이고 흥미로운 공연이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산대는 신라 사람들의 꿈과 예술혼이 어우러진, 우리 민족의 종합 예술을 꽃피운 특별한 무대 장치였습니다. 산대는 단순한 공연 공간을 넘어,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하고 모두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축제의 장이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