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음악사의 뿌리를 살펴볼 때, 고구려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700년 전, 삼국시대 초기의 고구려는 중국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활발한 교류를 하며 독자적인 음악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그 대표적인 산물이 바로 거문고입니다.
고구려 음악을 보여주는 벽화들
고구려의 음악은 당시 고분 벽화를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황해도 안악 3호분, 덕흥리 고분, 약수리 고분, 그리고 중국 지안에 있는 무용총이 대표적입니다.
특히 무용총 벽화에는 사냥 장면인 <수렵도>와 함께 춤추는 무용수, 7명의 악사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새 깃털로 장식한 모자, 긴 소매 옷을 입고 춤추는 모습은 고구려인의 예술 감각과 더불어 주변 국가의 음악이 함께 유입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중국과의 교류, 그리고 기록 속 음악
고구려는 백제·신라보다 중국과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에 음악 교류가 활발했습니다. 중국 음악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고구려 음악을 중국에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삼국시대 음악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과 일본의 역사서에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대표 노래: 황조가(黃鳥歌)
고구려 제2대 임금 유리왕은 두 왕비의 갈등 끝에 중국으로 떠나버린 치희를 잃고 깊은 슬픔에 잠깁니다. 홀로 돌아오는 길에 짝을 지어 노래하는 꾀꼬리를 보고 지은 노래가 바로 《황조가》입니다.
이 노래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향가로, 개인적 감정을 시적 언어로 표현한 고대 가요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나라 시인 이태백의 시 속 고구려
중국 최고의 시인 이태백(701~762)은 자신의 시 <고구려인>에서 고구려 무용수를 묘사했습니다.
금빛 장식을 꽂은 머리, 흰 앞치마를 두르고
새 깃처럼 휘날리며 춤을 추니
마치 해동에서 날아온 새와 같구나
여기서 "해동"은 발해 동쪽, 곧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로, 고구려 음악과 무용이 중국 문화권에서도 특별하게 인식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거문고의 탄생과 전승
고구려 음악을 대표하는 악기는 단연 거문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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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길이 약 150cm, 너비 19cm, 오동나무와 밤나무로 제작. 속이 비어 있어 울림이 크고, 6개의 줄은 굵기에 따라 다양한 음을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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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법: 나무 막대기 ‘술대’로 줄을 튕겨 연주합니다.
거문고의 기원은 《삼국사기》에 전합니다. 장수왕 때, 중국에서 전래된 칠현금을 본 음악가 왕산악은 이를 바탕으로 6줄의 새 악기를 만들었습니다. 연주 도중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 하여 ‘현금(玄琴)’이라 불렸고, 훗날 ‘거문고’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맺음말
고구려의 음악 문화는 단순히 고대의 유물로 끝나지 않습니다. 벽화, 기록, 시, 악기를 통해 남겨진 흔적은 오늘날 국악의 뿌리이자 정체성을 보여 줍니다. 특히 거문고는 한국 음악의 대표 현악기로, 천 년을 넘어 지금도 연주되고 연구되는 살아 있는 유산입니다.
다음에는 백제와 신라의 음악 문화를 살펴보며, 삼국시대 음악의 다양성과 그 전승 과정을 이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