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나라 가야, 음악으로 남은 큰 울림

한반도의 남쪽, 신라와 백제 사이에 자리했던 작은 나라 가야. 정치적으로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지만, 문화적으로 남긴 흔적은 의외로 깊고 선명합니다. 그 중심에는 ‘음악’이 있습니다.

노래로 시작된 나라, 가야

가야의 건국 신화는 조금 특별합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구지가〉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나라의 탄생을 여는 의식이었습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이 짧고도 강렬한 가락은 백성들이 하늘에서 내린 임금을 맞이하는 주문이자 노래였습니다. 결국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알 여섯 개, 그리고 그 속에서 태어난 여섯 명의 왕이 가야 연맹을 이끌었습니다.
즉, 가야의 시작은 노래와 함께였습니다. 다른 나라들이 무력이나 정치적 서사로 건국을 설명하는 것과 달리, 가야는 ‘노래로 나라가 열렸다’는 독특한 정체성을 가진 셈이지요.

삼국유사 표지

먼 나라에서 건너온 인연, 허황옥

가야의 또 다른 흥미로운 장면은 수로왕과 허황옥 공주의 만남입니다. 붉은 돛을 단 배를 타고 먼 나라에서 건너온 공주. 그녀는 자신을 아유타국의 왕녀라 소개하며, 신의 뜻에 따라 가야에 왔다고 말합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아유타국이 인도인지, 혹은 태국인지 논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결혼이 가야가 이미 바다를 통해 먼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상징이라는 점입니다.

허황옥 공주를 맞이하며 벌어진 의식은 단순한 혼례가 아니라 국제적 교류의 상징이었고, 그 후 백성들이 해마다 춤과 노래로 이를 기념한 것은 가야 문화가 얼마나 노래와 의례에 깊이 뿌리내렸는지를 보여줍니다.

가야가 남긴 가장 큰 유산, 가야금

가야의 음악적 성취는 단연 가야금으로 대표됩니다. 가실왕이 중국의 ‘쟁’을 참고해 만든 이 악기는, 단순한 모방이 아닌 가야만의 창조적 재해석이었습니다. 오동나무 울림통과 명주실로 완성된 가야금은 12줄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곧 일 년 열두 달을 상징했습니다.

여기에 음악가 우륵이 등장합니다. 그는 가야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역 이름을 딴 곡을 작곡했고, 이를 통해 가야금은 단순한 악기가 아닌 지역 정체성과 문화를 담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가야가 멸망하면서 우륵은 신라로 건너갔지만, 그의 음악은 새로운 땅에서 꽃피웠습니다. 신라는 가야금을 대표 악기로 받아들이며 그 전통을 계승했고, 덕분에 오늘날 가야금은 한국 음악의 상징적인 악기로 자리잡았습니다.

작지만 크다, 가야의 문화유산

정치적 힘은 약했지만, 가야는 문화를 통해 자신을 남겼습니다. 건국 신화 속의 노래, 바다를 건너온 국제적 인연, 그리고 지금까지 전해지는 가야금.
이 모든 것은 작은 나라가 남긴 큰 문화의 울림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야를 기억하는 이유는, 바로 그 음악과 이야기가 여전히 우리의 정체성 속에 살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